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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거닐다/뜯어보기

책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 리뷰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대한민국은 어느새 5월 31일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전국 각지의 후보 사무실건물마다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텔레비전 등 언론매체에서도 서울시장 후보들의 행로를 취재하는 등 '선거철'에 들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 [선거제도와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은 참으로 시기적절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첫머리에서, 선거제도의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기껏해야 비례대표 의석을 몇 석 증감한다거나 소선거구냐 중선거구냐 하는 정도의 논의에 그치고 마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우리나라 정치 및 정치가들의 정치적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이어서 세계에서 시행되었거나 또는 시행되고 있는 다양한 선거제도들을 소개함으로써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국 정치에 대한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하여, 즉 '정치적 상상력'을 키워 한국 정치에 더 많은 가능성을 열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1987년의 항쟁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비로소 민주적인 절차가 보장받는 선거제도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해놓고 정작 민주화를 위한 실행은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대의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제도인 선거의,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실현에 도달하고자 하는 다양한 제도를 소개함으로써 현재 우리의 선거제도가 얼마나 민주주의의 실현에 진정으로 이바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재검토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정치와 정치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제도가 이토록 다양하게 존재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아직도 많은 정치 교과서 및 정치학 관련 서적이 선거제도에 관해서는 소수/다수 대표제나 소/중/대선거구제, 끽해야 비례대표제의 개념 정도를 소개하고 있을 뿐이고 따라서 국민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대부분 그쯤에서 한계선이 그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매번 투표를 하고, 민심이 원치 않던 결과를 목도하면서도 그러한 상상력의 한계로 인해, '선거가 할 수 있는기능이 여기까지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국민들이 할 수 있는 변명거리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영토가 그다지 넓지는 않다고 해도, 민의를 가장 충실히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찾아 시도해 볼만한 기회는 전국 각지(各地)에, 각시(各時)에 널려 있건만, 수많은 선거제도들 가운데에서 중앙에서 내려오는 매뉴얼에 따라 한두가지 정도만 일률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현실 역시도,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점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능한 사표를 최소화하고, 가능한 민심이 바라는 결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 선거제도가 추구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목적이라면, 각계각층을 대표할 사람들이 모여 궁리하여 하루빨리 가장 우리나라에 적합한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뜻으로 뽑은 국회가 국민의 뜻이나 상상을 벗어나는 이기적 당파싸움이나 상호 비방전쟁으로 물들어, 정작 민의를 좀 더 충실히 반영할 제도에 대한 근본적 논의조차 하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이로 인해 '민의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선거제도논의의 주제 자체가 '충실한 밥그릇 싸움'으로까지 퇴색되어, 점점 정치적 무관심을 나타내는 국민이 증가하는 것은 실로 비극적인 악순환이라 하겠다.

 

저자는 정치적 상상력의 부재로 인한 비극적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한국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현실을 탓하여 정치적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의미한 것은 없다며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토록 좋은 의도로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의아스러울 정도로 상당히 적은 책 자체의 분량으로 인해서인지 안에 담겨있는 깊은 내용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치게 압축적이면서, 수많은 선거제도들의 특징적인 차이점 등을 한눈에 구별지어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입문자나 교양적 수준의 독자에게는 그저'실제로 지구상에는 이토록 많은 선거제도가 존재한다'는 정도를 일깨운 것만 해도 상당한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밖에, 마지막의 [제3장 한국선거제도,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서 저자는 지역감정 문제를 예시사례로 들었는데, 지역감정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결론 없이 무의미하게 이어지는 일반적 논쟁에서 벗어난 점이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그 해결방안의 고려가, 앞의 장들에서 전개했던 우리나라 헌정의 현실이나 선거제도 소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는 껄끄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들 한다. 뿌리부터 새로 바꿔야 한다고는 하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자의 제안처럼, 민의가 1차적으로 투입되는 제도부터 개선 또는 개혁함으로써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진정 정국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한다면 국회 및 정부는 선거제도의 논의에서 국민을 배제시키지 않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의 이미지개선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쏟음으로써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증을 해소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세계의 각 국가가 자국의 정치현실에 가장 적합한 제도를 찾기 위해 여러 지역 선거구에서 다양한 제도를 시도해보고 발전시켰던 것과 같이, 우리나라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본 자치성을 살리는 의미에서 각 지방자치단체 차원으로 새로운 선거제도를 논의, 시도해 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이런 새로운 시도가 그 지역 실정에 맞는, 우리나라 정치에 가장 어울리는 제도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