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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거닐다/찾아가기

연극 셰익스피어의 사내들 후기

 

 

 

 

우선 한마디로 평하자면,

지난번 본 현자 나탄이, 작품의 규모에 비해 연출력이 부족해서 아쉬웠던 작품이라면

이번 셰익스피어의 사내들은 작품의 규모에 비해 잉여롭도록 연출력이 넘친 작품...

 

 

 

1.

우선 젊은 극단의 작품이라 그런지,

도전적이라 할 만한 은유의 극본이었다.

 

비주류 특유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느낌이랄까,

대학로에 차고 넘치는 주류로서의 상업적 연극을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완성도와 관객의 호응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하는 치열한 고민이 엿보였다.

 

 

 

 

2.

검색에서 걸리는 후기 등에 주제의식이 뭔지 모호하다는 얘기가 많은데,

내가 보기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라는 위인 자체에 대한 2차 창작을 통해 명작 탄생의 배경을 상상해보고

'연극과 연극인의 삶'에 대한 자기위로를 시도한다.

 

즉 셰익스피어는 어디까지나 거들 뿐...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진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연극이란 무엇인가? 왜 연극을 하는가? 연극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셰익스피어의 인생을 다소 무리하게 끌어온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그의 작품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해 본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참신했고

결과적으로 도전작 치고는 작품 퀄리티도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3.

이 "연극과 연극인의 삶에 대한 자기위로"라는 주제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어 보자.

 

'셰익스피어의 사내들'은 다음 질문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는 것으로 내러티브를 풀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명작은 어떻게, 무엇을 바탕으로 창작된 걸까?"

 

그리고 그 가설은,

유랑극단을 이끌던 셰익스피어가, 어느 묘지에 흘러들어가

그곳에서 만난 세 명의 사내에게서 들은 인생 사연을 극본으로 만들어주는데

그것이 햄릿이고, 오셀로고, 리어 왕이라는 것이다.

즉 그의 명작들은 알고보면 개개인의 인생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야기라는 것.

 

분명 시작은 셰익스피어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중반쯤부터는 어느 새인가 "연극은 인생 그 자체다"라는 주제를 꽤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에, 셰익스피어가 세 명의 사내들을 자신의 유랑극단의 배우로 올려서 연기를 하게 하고

그 연기를 통해 그들의 삶에 맺혀 있던 한과 응어리를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연극이 갖는 카타르시스의 효과, 그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함께 주제의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사실 내게는 낯설지 않은 주제다.

작년 쯤에 봤던 "아리랑 랩소디"에서도 상당히 메인으로 밀었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 주제 요즘 유행하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런 주제의식을 가진 연극은 대체 누구를 위한 연극인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든다.

 

'연극'이라는 콘텐츠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비연극인들을 위한 연극일까?

아니면, 연극을 직업으로 삼고도 그것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연극인들을 위한 연극일까?

 

다시 돌이켜 봐도, 내가 이 작품을 통해 전달받은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연극은 이래서 존재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연극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이렇게 삶을 담고 있으며, 이렇게 삶을 감화시킵니다."

 

 

 

 

 

4.

아마도 여기서부터는 극본의 문제점 얘기가 될 것 같다.

 

젊은 극단의 의욕 넘치는 창작극인만큼, 좋은 말만 쓰고 싶은 기분도 내심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지적할 포인트을 짚고 넘어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래도 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다소 억지를 부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선 명작을 현실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2차 창작을 가한 캐릭터들 말인데,

현실적이라고 치기엔 캐릭터의 성격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오버"다.

 

셰익스피어가 도대체 반쯤 나사풀린, 아니 어쩌면 수은 중독(..)으로 보이는 건 그렇다 치자.

오셀로의 모티브가 된 사내가 참 안 어울리게 협조적인 것도 그렇다 치자.

리어 왕의 모티브가 된 사내는 안 그렇게 생겨서는 왜 이렇게 사방 오지랖이 넓은지... 뭐 그것도 그렇다 치자.

 

햄릿의 모티브가 된 사내는 ... 대체 답이 없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감정변화의 진폭이 크고 뚜렷하며 그야말로 극적인 존재인데

그 감정변화의 진폭이 발생하는 사건들과 그에 따른 그의 심리 변화에 전혀 공감이 안 간다.

 

아니, 그냥 공감이 안 가는 건 아니고

좀 더 찝어 말하자면, '성인으로서' 공감이 안 간다.

 

이 친구 꼴로 봐서는 도저히 연극에 참여할 이유가 없는데

어느 샌가 호갱이 되어 참여하고 있고,

셰익스피어와 가장 첨예한 갈등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국엔 셰익스피어 말에 감화되어 다 극복하고 호갱짓(...)을 하고 있다.

 

마치 저것은 ... 어릴 적 본 애니메이션에서 어두운 과거를 가진 악당이
주인공의 말에 감화되어 악당짓을 그만두게 되는 클리셰를 어른이 되어 다시 접한 것 같은 느낌인데,

"뭐? 방금 그걸로 지금 심경의 변화를 겪은 거야? 진짜 그 대사로?"

그냥 막 오그라든다. 발가락이 발뒤꿈치를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아무튼 그 친구가 성 내는 패턴도 ... ㅋㅋ

다 꺼지라고 그러고, 혼자 내버려두라고 그러고, 니들이 뭘 아냐고 그러고, 뛰쳐나가고 ...

한창 중2병을 앓는 진짜 중2의 모습 그대로다.

 

아 물론 진짜 햄릿도 지독한 중2병을 앓는 캐릭터가 맞긴 한데...

햄릿은 그 대사가 중2병 환자라서 그렇지, 사고방식 자체는 중2병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그냥 존재 자체가 중2병...

 

배우의 연기에는 나무랄 데가 없으니 배우를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닌데

캐릭터 자체가 통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심지어 민폐로 등장에서 민폐로 끝나고 말이지...

 

 

 

 

5.

어느새부터인가 연극 볼 때 유심히 보는 부분이 있는데

현재 극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대사를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과,

얼마나 대사가 유려하고 자연스러운가? 라는 부분이다.

특히 후자는 내가 생각하기에 극의 완성도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도 이 작품은 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내용을 인용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냥 인물들 간의 잡담(?)은 구어체로 풀어도 될 것을, 

문어체를 그대로 갖다 쓴 대사가 있어서 가끔 영 거슬리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몰입감이 슝 슝 하고 사라지려는 위기가 몇 번 있었다.

 

이건 퇴고를 덜 해서? 아니면 배우들이 각본가에게 피드백할 기회가 없어서?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는데...

 

 

 

 

 

6.

이런 다소 부실한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공연이 끝나고는 꽤 좋은 작품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은

열정 가득한 배우들의 연기와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연출력 덕분이었다.

 

이것이 각본이 비워놓은 극적인 효과를 살려놨고

관객들의 시선을 끝까지 잡아놓을 수 있었다.

 

요근래 본 창작극 중에는 연출력이 정말 빛을 발한 작품인 것 같은데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자세히 적자니 왠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

간단히만 정리하자면

 

- 셰익스피어의 꿈 속, 사람을 밟고 서 있는 위태로운 그녀

아 이건 정말 감탄사가 소리로 나올 뻔 했다. 누가 이렇게 참신한 생각을 했지...

 

- 배우까지도 무대 장치로 활용하고 조명의 극적 효과를 한껏 살린 마지막 장면

이건 뭐 그냥 소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