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을 거닐다/번역하기

한글화 프로젝트 기록: 니노쿠니2 번역 후기

https://blog.naver.com/physics1114/221493219411

 

니노쿠니2 한글 패치 1.01 배포

팀 한글화의 궤적에서 48번째 한글 패치 니노쿠니2 한글 패치 1.01 버전을 배포합니다. - 본 패치는 19.3.1...

blog.naver.com

까마득히 먼 옛날, 곰곰 생각해보니 10년 전 일본 유학 중,

처음으로 어느 게임의 한글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후로

한동안 생업에 몰두하느라 잊고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새로 참가하게 된 한글화 프로젝트.

 


 

2018년 3월, 시작은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맞은편 자리에서 점심 식사를 하시던 회사 동료분이 내 전공을 알고는

자기가 팔로잉하는 블로거 분이 니노쿠니라는 게임의

후속작 한글패치 번역가를 모집하고 있더라고 흘리듯 한마디 해주신 것.

 

사실 그 전까지는 니노쿠니라는 게임 자체를 몰랐었는데,

이리저리 들여다보니 작품 퀄리티나 내용이나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대뜸 그날 저녁인가 번역에 참여하겠노라 신청하고서,

퇴근하고 짬짬이 구글 시트로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시트를 들여다봤더니 게임 스케일이 워낙 커서 그런가

아이템이건 퀘스트건 분량이 어마어마했고 참여자도 많았다.

대사만 약 2만줄 가까이로 분량이 워낙 많다보니 프로젝트 리더 입장에선

아무래도 날 포함해서 다수의 번역가를 모집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번역가들이 큰 기준 없이 대강 모집되다보니

많은 부분이 기계 번역이 의심되는 번역물로 채워지게 된 것이었다.

도저히 한글 패치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문장들이 차고 넘쳤다.

한줄 한줄 성실하게 번역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한탄스러울 노릇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천천히 서브 퀘스트 분량을 번역하면서 두고 보기로 했다.

 

마침내 초벌 번역이 끝나자, (아마도)더 높은 기준으로

날 포함하여 너댓명의 검수자가 추려졌고

이 시점부터 드디어 엉망이던 번역문들을 갈아치울(...) 명분이 생겼다.

솔직히 말이 검수지,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재번역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이제 와서야 하는 말인데

어쩜 그렇게 읽어도 읽히지 않는 말들을 번역문이랍시고 올릴 수 있는지...

나도 아마추어에 불과하지만, 솔직히 이건 너무 심했다.

 

'이 분량 번역한 사람 한국인 맞아?'라는 생각을

검수라고 쓰고 재번역이라고 읽는 작업 내내 셀 수 없이 했다.

솔직히 외국인이 썼다고 해도 전혀 의심스럽지 않을 수준이었다.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기계가 썼다면 이것보다 나았으리라.

 

 

번역가를 모집하는 한글화 프로젝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번역가'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번역'을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원문 대사들을 긁어서 기계 번역기로 돌린 다음 시트에 붙여넣기하는,

그런 작업을 할 생각이라면 번역가로서는 참가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건 번역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그냥 사무 알바다.

 

이런 멍멍이 같은 작업을 해준 이도 소중한 참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라도 패치 크레딧에 닉네임 한 줄 올리고 싶었던 걸까.

이런 걸 올리고도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메인으로 맡은 분량은 본래 서브 퀘스트 쪽 대사 6000줄 분량이었는데,

한 글자 두 글자 고치다 결국 처음부터 재번역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메인 스토리 대사 검수를 담당하신 양반이

작업 초반 단톡방에서 자신의 화려한 한글화 경력 자랑이나 하면서

입만 오지게 털기에 좀 쌔-하다 싶었는데

결국 몇 달이 가도록 작업을 1도 안 한 채로 막판에 ㅌㅌ하는 바람에... -_-

졸지에 나머지 분들과 함께 메인 스토리 대사까지 나눠서 진행하게 됐다.

 

분량이 너무 많아서 본편 메인 스토리랑 서브 퀘스트 대사만 간신히 전수 체크했고

그 밖의 DLC나 기타 아이템 설명과 같은 잡다한 분량 쪽은

체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패치가 나가서 그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패치 배포 후 마침 같은 파트 분이 플레이해보셨다길래 물어보니

딱히 플레이에 큰 어려움은 없으셨다고 해서 그나마 다행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