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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디자이너다/게임하기

젤다 야숨 감상

임신 후기에 처음 시작한 야숨.
조리원에서 깔짝깔짝 하다가 또 눈이 아파서 그만둠.
결국 아이가 신생아 시기를 조금 지나서부터 다시 시작했고, 낮에는 육아하고 새벽에 4시까지 달리는 미친 스케줄로 한 달 만에 겨우 엔딩을 봤다.

사이드 퀘스트, 사당, 도감은 모두 클리어하고, 지도는 50% 정도 열었음. 망할 놈의 코로그…

- 레데리2랑 처음 감상이 꽤 비슷하다.
처음부터 막 탐색해야겠다는 욕망이 샘솟기보다는
어딘지 끝모를 막막함이 엄습하는 느낌.

- 일단 초반 주인공의 조작감이 좀 답답하다.
달릴 때 스태미너적 한계가 명백히 보이거나
액션 게임의 주인공스러운 파워풀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이 초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아이템(말, 물약 등)에 대한 갈망부터 샘솟게 한다.

- 처음 노인을 만날 때까지는 약간 전형적인 튜토리얼 같은 느낌이었으나, 노인을 만나 사당 네 개를 클리어해야 햐는 시점부터 이미 자유도를 반 이상 풀어준 느낌이라, 선형적 퀘스트에 익숙한 사람은 이미 이 단계에서 더욱 큰 막막함이 엄습함.

- 주인공이 불에만 잘못 데여도 피가 쫙쫙 깎이는 경험에서, 얘 데리고 함부로 어디 못 가겠다라는 생각이 듬. 아주 쉬운 게임오버, 그리고 게임오버 시의 상당한 로딩 타임. 그게 처음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를 소극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함.

- 길도 따로 안 알려주고, 그냥 어딘가 보이는 영 수상한 건물(사당이나 시커 타워의 인위적인 주황색)에 핀 꽂는 법만 가르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아마 야숨의 난이도가 제일 높은 순간이 이 대목이지 않을까.
물약도 없고 무기도 없고 방어구도 마땅치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멀리 어딘가를 가라니?

- 처음으로 나뭇가지나 녹슨 검 따위를 얻고서 보코블린을 때려눕히고 안심하려는 순간, 그 다음 전투 쯤해서 파괴되는 무기에 대한 경험이 다시 플레이어를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린다. 뭐야 이거 전투를 회피해야 하는 게임이었어?

- 이때부터 무기가 될 만한 걸 인벤에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벤의 무기창은 왜이렇게 좁단 말인가… 새로운 무기를 먹을 때마다(특히 적의 무기) 뭘 버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초반에는 무기의 성능이 거의 고만고만한 마당이라 더 선택의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어떤 무기의 내구도가 얼마나 닳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 길가다 보면 굴릴 수 있는 바위, 연못 위의 묘한 인위적인 동그라미 등을 보고 이게 의미 없이 이렇게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뜻을 모르기에 그냥 지나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플레이를 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지나간다. 이게 다 코로그였음은 상당히 나중에 알게 된다.

-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코로그 퍼즐은 마그넷을 얻고 나서 늪에 있는 철구를 들어올려 그루터기에 넣는 순간이었는데, 처음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이런데에 컨텐츠가 있다고? 싶은 거지.

- 코로그의 열매가 누적되는 걸 보고 이런 게 앞으로 상당히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다음에 엉뚱한 벽에 놓인 퍼즐을 풀거나, 언덕 정상에 놓인 바위를 들고서 다음 그 다음 코로그를 만나게 되면서, 이 월드에는 이런 코로그가 드글드글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처음에는 반가움보다는 또다른 막막함(지도에 다음 코로그의 위치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을 느꼈던 것 같다.

- 후반부로 갈수록, 코로그를 만나는 경험은, 아 내가 온 이 길도 이 게임 기획자들이 한번은 와주길 바란 위치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가울 지경이다. 야숨 기획자들과의 보물찾기 같은 느낌이었달까. 일부러 코로그가 있을법한 곳을 찾아서 가기도 하고, 갔는데 뭐가 없으면 실망하기도 하고 그랬다.

- 코로그의 가면을 조금 더 일찍 줬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얻는 순간 앞에서 모르고 지나쳤을 수많은 코로그 존이 생각나서… 하지만 지나치게 초반에 코로그 가면을 얻게 되면 플레이 경험이 코로그 위주로 흘러가게 돼서 더 정처없이 월드를 헤매다 낙오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다.

- 도감. 월드의 구성을 보니 여타 오픈월드류 게임과 같이, 도감이 당연히 있을 것 같았지만, 이 기능이 상당히 나중에 열려서 처음에는 매우 의아했다. 왜 처음부터 안 열어줬지? 특히 무기나 몬스터 같은 건 처음에 모르고 지나쳐서 결국 등록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 같이 초반부터 차곡차곡 완성시키는 것을 추구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이것도 코로그와 같이, 너무 초반에 열어주게 되면 도감작에 너무 초반에 집중하게 돼서 당초의 목적성(링크의 성장-4신수 획득-과 가논 토벌)을 잃고 표류하게 되기 쉬운 컨텐츠라서 나중에 열어주는 것을 택했다고 생각된다.

- 사실 야숨도 구성 자체는 다른 오픈월드류 게임과 아주 다르지는 않다. 광활한 월드, 자유로운 탐험, 빡센 수집요소 등. 하지만 월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장치들을 비교적 중반부 이후에 풀어준 덕에 처음 시작한 플레이어를 당장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방향으로 몰아넣는 효과를 냈다. 어찌되었건 RPG는 성장에서 오는 체감 재미가 가장 큰 장르기 때문에 그 본연의 재미를 우선적으로 맛보면서 게임에 정착하게 된다.

- 많은 게임들이 강제에 가까운 튜토리얼로 어떻게든 게임의 초반부를 주입해주려고 하는데, 야숨은 그걸 안 한다. 단점은 이게 게임의 난이도를 초반에 거의 소울라이크 급으로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고, 장점은… 초반의 고생이 가면 갈수록 일종의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지더라는 거다. 여타의 게임들이 초창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마치 젊은 시절 무용담처럼 기억하게 된다.

- 시작의 대지에서 처음 바위록을 만났을 때와, 처음 가디언을 만났을 때의 공포는 정말 잊혀지지 않는다. 특히 바위록은 그냥 초반 튜토리얼용 필드 보스인 줄 알고 리모컨 폭탄을 마구마구 던졌는데, 피가 전혀 닳지 않아서 황망했던 느낌이 생생하다. 나중에는 그냥 가볍게 올라타서 대검질 몇 번 하니까 ‘참 쉽죠?’ 였는데… ㅋㅋㅋ

- 가디언도 처음에는 그 특유의 소리와 레이저 때문에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적이었다. 거의 호러 게임에 필적하는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경고를 해주던가 뭘 어떻게 하라던가 가르쳐줄 대목일 텐데, 아무 것도 안 가르쳐주고 그냥 당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 가디언을 처치함으로써 뭐 못 갔던 곳을 가게 된다거나 대단한 걸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초반 동선에 갑툭튀로 만나게 되는 무시무시한 강적이라니… 사실 굳이 여기서 안 만난다고 해도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음.

- 아무튼 야숨의 적 배치 패턴은 정말 최대의 자유도가 보장된 오픈 월드 게임답다고나 할까. 이건 ‘붉은 달’ 리셋 시스템 덕분에 가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드의 적 난이도가 주기적인 리셋을 통해 플레이어의 상황에 따라 상승한다. 그러니 배치 자체는 플레이어의 동선에 전혀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므로 지형지물과 밀도 정도만 생각하면 된다. 이 부분이 그간 갖고 있던 레벨 디자인 철학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이라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 지도는 최대로 확대해 보면 군데군데 신경쓰이는 그림이 있고, 실제로 그쪽으로 다가가면 뭔가가 있기는 한 게 레데리2와 비슷하다. 하지만 거점이 처음부터 표시되지 않는다는 부분은 초반의 막막함에 보탬이 되는 포인트기도 하다. 어디까지만 가면 괜찮겠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멀리서 첫 마구간을 봤을 때도 처음에는 인간형 적 소굴인가 하고 잠깐 의심하기도 했었다.

- 지도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어떤 지명들(산 이름, 강 이름 등)은 처음부터 표시되어 지도의 복잡도를 늘리는데 큰 기여를 하고, 어떤 지명들은 거의 있으나마나한 느낌인데, 길가다 보이는 조그만 다리에 붙은 이름은 그 존을 지나야만 지도에 추가되는 형태다. 좀 일관성이 없고 납득하기 힘든 시스템이다. 일관적으로 지도를 탐험하면서 지명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우선순위가 후반으로 밀리다가 정리가 되지 않은 컨텐츠였을 가능성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