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꽤 단순했다.
결혼식도 내맴대로 한복입고 박물관에서 했는데
출산도 관행 따라 남들 다 하는대로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반려인과 소중한 순간을 오롯이 함께하고 싶었고
태어날 아이에게도 가능하다면 최대한 안전하고 편안한 환경에서
첫 세상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일반적 자연분만이나 제왕절개의 좋은점 따위는
일부러 흐린 눈으로 외면하며,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기로 마음 먹었다.
뭐 내가 아무리 마음을 먹었어도, 병원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다 소용없는 일인데
집 근처의 산부인과를 알아보다 찾아낸 GM제일산부인과에서
마침 자연주의 출산을 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패기와 의욕만 앞서 선택한 자연주의 출산의 길.
정영철 원장님은 소문대로 아주 쿨하신 분이라 묘하게 더 신뢰가 갔다.
원장님 시키는대로 계단 오르기 운동도 열심히 하고 산전요가도 열심히 하고
남편과 출산 리허설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그 외, 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자연주의 출산 관련 책(히프노버딩)도 최소 세번은 통독한 듯...
임당 검사에서 재검이 뜨는 바람에 울적한 기분에 잠기기도 하고,
한겨울 길바닥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안그래도 안 좋던 골반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하고
온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기도 하고
양치덧이 나서 양치할 때마다 아침을 다 게워내기도 하고
그렇게 온갖 일들을 겪으며 어영부영 40주를 맞이했다.
몸무게는 임신 전에 비해 4kg 남짓 늘었을 뿐이라
막달까지도 그럭저럭 살만했는데
분만 예정일이 되었는데도 진통이 안 걸려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다음날엔
반려인과 생면 파스타를 먹으러 멀리 상암동으로 원정도 나가고
연보랏빛 하늘 아래 하늘공원도 열심히 올라가서
맹꽁이 소리와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왔다.
그렇게 40주 4일차, 드디어 진통 비스무리한 게 왔다.
천천히 주기적인듯 아닌듯, 생리통 비슷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다음날이 되자 슬슬 양 골반을 누군가 잡고 비트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제 오늘 내일이구나 싶어서 닭한마리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땡볕 아래 집까지 걸어와서 쫙 뻗었다.
마침내 40주 5일차 새벽...
누가 골반을 잡아 벌리는듯한 통증은 10분 간격으로 심해졌고
으으으으으 신음하다 겨우 잠들었다 다시 신음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반려인은 계속 시간을 재며 골반을 이리저리 밀어줬는데
그러면 한 3초 정도 살 것 같더니 다시 죽을 것 같았다.
조산사님은 주기가 3분까지 짧아지면 오라고 하셨는데
진통 주기가 너무 들쭉날쭉해서 도저히 각이 안 나왔다.
새벽 4시에 이르러 주기가 5분에 겨우 가까워지고
출산가방을 챙겨 산부인과 출산센터로 갔다.
교관 같은 박길순 조산사 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침대에 누워서 끙끙대고 있자니 내진을 하시는데
그 순간 양수가 터져서 흥건해졌다.
그때부턴 진짜 골반이 쪼개지는 듯한 느낌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조산사님은 짐볼을 끼우고 이리저리 내 몸을 돌리면서
출산 자세를 잡아주셨다.
근데 진심 골반이 비틀어져서인지 진통이 심해도 너무 심한데
아이는 내려올 기미를 안보이고...
대체 이게 언제 끝나려나 싶어서, 조산사님께 우는 소릴 내면서
그냥 무통 맞거나 제왕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엉엉 울다시피 물었는데
미리 약속해둔 문서대로인지, 조산사님은 들은 체도 않으셨다ㅋㅋㅋㅋㅋㅋ
지금이야 웃으면서 쓰지만,
그때는 옆에서 물을 먹이면서 골반을 밀어주는 반려인한테
나 그냥 죽고 싶어ㅠㅠㅠ꺼이꺼이 하고 아주 생쇼를 했다.
멘탈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보인 느낌 ㅋㅋㅋㅋㅋ
두 시간을 넘기며 끙끙거리다보니 점점 힘도 빠지고
아 이거 애가 나오겠나... 이러다 내가 죽겠다 싶었다.
조산사님은 링거를 달아주셨고
진통이 길어질 것 같았는지 반려인은 일단 아침을 사러 맥도날드로 갔다.
그 사이에 조산사님이 손을 밑으로 넣어서 아이 나올 길을 만들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갑자기 아래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뭔가 내 의지로 힘을 준다기보다는 그냥 갑작스럽게 힘이 막 들어가는 느낌?
조산사님이 그렇지 그렇지 하며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해주기 시작하셨고
다른 의료진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반려인이 돌아오질 않으니 나는 나대로 애가 탔고
간호사분들은 반려인에게 전화를 걸고 난리가 났다.
드디어 맥도날드 봉투를 들고 나타난 반려인은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턴 정말 그냥 숨참고 밀어내기만 죽어라 했더니
어느샌가 뭔가 쑤욱 하고 빠져나왔고
조금 이따가 으엥하고 낯선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따끈따끈하고 미끄덩한 것이 내 배위에서 꼬물락꼬물락 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반려인이 훌쩍훌쩍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들이 양수를 빼내는데
얼굴도 못 본 작은 아이가 엄청 켈록켈록거려서 안쓰러우면서도
모든 맥이 빠져서 꼼짝도 못하고 그냥 아... 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뭔가 엄청나게 감격스럽고, 엄청나게 감동해서 펑펑 울 줄 알았는데,
첫 출산의 기억은 그냥 뒤지게 아프고, 금방이라도 뒤져버릴 것만 같았고
한번 힘 들어가니까 끙끙끙끙 하다 후루룩 나온 후로는
그냥 멍...하고 맥이 탁 풀리는 ㅋㅋㅋㅋ 그런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꽤 출혈이 심한 편이었고
탯줄이 짧아서 아이가 나오기 힘들어했다는 모양이다.
태반이 다 나오기 전까지 아이는 내 아랫배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곧 남편이 가위를 들고 탯줄을 잘랐고,
아이를 잠깐 안고 있다가 처음으로 내 젖을 물리자
막 태어나서 계속 울던 아이가 입을 딱 벌리더니
젖꼭지를 물고 쪽쪽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후...
어쨌거나 당초의 의지대로 무통이랑 촉진제 없이 28시간 진통 끝에
3.15kg의 건강한 아이를 소환하는데 성공 ㅠㅠ
히프노버딩 책에 나온대로 무통이나 촉진제 같은 약물을 안 쓴 덕인지는 몰라도
아이는 처음부터 내 젖꼭지를 아주 잘 물어줬고
덕분에 젖몸살이나 유두혼동 같은 어려움 없이 완모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책과는 다르게, 감통이니 뭐니 하는 건 나에게는 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너무 아프니까 수없이 연습했던 호흡법도, 자기최면기법도 다 소용이 없었다.
아무런 약물 처치 없이, 산모와 남편, 태아의 싱크만으로 행복하게 낳았다는
자연주의 출산의 희망편 전개는,
골반과 허리가 대단히 건강한 산모에게나 가능한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출산 동반자 책을 읽으며 열심히 공부한 반려인 아니었으면
대체 그 험난한 진통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둘이서 그렇게 아둥바둥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진통 간격은 줄어들지 않은 채로 통증 강도만 점점 심해져 갔고,
그렇게 만 하루를 넘기자 강철 같던 나의 의지고 나발이고,
완전히 탈진해서 그냥 다 놔버리고 제왕절개 수술 엔딩으로 끝낼 뻔했다.
어쨌거나 경험 풍부한 우리 담당 조산사 선생님의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 덕에
이 뒤틀린 척추와 골반으로 이루어진 못난 몸뚱아리로
하드코어 업적 하나 찍었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
생각지 못한 장기진통과 과다출혈로
옥황상제 새끼발가락과 하이파이브하고 돌아오긴 했어도
누가 자연분만 아니랄까봐 엄청난 속도로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
회음부 회복이 너무 빠른 나머지, 꼬맨 실이 살을 파고들기 시작해서
참다참다 죽겠어서 조리원에서 한밤중에 다시 병원에 가는 이벤트까지 겪었다.
지나고 나면 정말 아련하게 느껴지는,
그러나 떠올리면 몸서리가 절로 나오는 초산의 경험.
자연주의 출산을 추천하겠는가? 하면 추천할만 하다.
출산을 적극적으로 공부하면서 두려움을 느낀적이 없고,
그렇게 고통 속에 출산하면서도 무서운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술실의 분만 의자가 아닌 넓은 침대에서
남편과 함께 진통을 겪으며 아이를 맞이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비록 멘탈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의 진통에 몸부림쳤지만서도,
인간적으로 산모 개인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쨌거나 4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이를 낳길 정말 잘했다 싶은 마음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다시 둘째를 가질 것인가...
진통하면서 둘째는 없다!!! 고 외쳤던 걸 생각하면 ㅋㅋㅋ
그저 쓴웃음이 나온다.